[리뷰]세계의 끝에 대한 연민과 분노, '윈드 리버'

[한겨레 토요판 – 영화감별사]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에 꽁꽁 묶여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장소라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환경이 인간(또는 문명)에 결정적인 요소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은, 그것도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덕분에 영화는 블랙홀을 뚫고 몇 십 광년 떨어진 성단의 행성까지 가기도 하고, 백인 침략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의 남미대륙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도 한다.

<윈드 리버>는 굳이 그런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환경이 인간의(또는 문명의) 얼굴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틀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배경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세상의 끝’이다. 그곳은 일단 ‘와이오밍 주 소재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공식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붙인 이름 따위는 이곳에선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이곳은 미국 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주(州), 아주 길고 가혹한 겨울이 몇 달이고 계속되는 땅, 로드아일랜드 주 정도의 면적을 여섯 명의 경찰이 지키는 곳, 감옥에 가는 것을 외려 반기는 듯한 젊은이들을 “어딜 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테니까”라는 체념 섞인 냉소로 이해하는 곳, 살인범을 잡는 것만큼이나 시체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그런 곳이다.

각본가이자 감독인 테일러 쉐리던이 각본가 ‘데뷔작’ <시카리오>의 말미에 적어 넣은 “이곳은 약육강식의 늑대 소굴이니 어서 이곳을 떠나요.”라는 대사는 <윈드 리버>의 세계에서 그야말로 뼛속까지 파고든다.

 

 

영화는 뭔가에 쫓기는 듯 허허벌판을 달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시간은 한밤중. 벌판은 모두 눈으로 덮여있고 소녀는 맨발이다. 입김이 뱉은 그대로 얼어붙을 듯한 추위와 어둠을 뚫고 달리던 소녀는 생명의 흔적이라곤 자신의 발자국뿐인 눈밭 위에 쓰러진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운명의 냉정한 눈알 같은 보름달만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눈밭 위의 양떼. 굶주린 늑대들이 그 양떼를 포위한 채 응시하고 있다. 언제 공격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늑대들은 하나씩 눈밭에 나동그라진다. 그리고 잡목 사이에서 흰색 위장복을 입은 사냥꾼 겸 야생보호구역 경비원 ‘코리(제레미 레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상징치곤 너무 노골적인 이 도입부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주인공 코리는 늑대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수호자다. 이는 아예 영화의 대사로 천명되고 있다. 눈밭을 달리던 소녀는 결국 피를 토한 채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된다. 코리는 오랜 이웃이자 친구인 소녀의 아버지(길 버밍엄)를 찾아가 위로한다. 코리가 떠날 때 “어쩔 생각이야?”라는 소녀 아버지의 질문에 코리는 “사냥꾼이 사냥 말고 뭘 하겠어요?”라는 짤막한 답을 돌려준다. 즉, 이 영화는 한 소녀를 죽게 만든 늑대를 사냥하는 사냥꾼의 이야기다.

그런 이유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의문은 많지 않다. 이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① 양을(즉 죽은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늑대는 누구인가, ② 코리가 그 늑대를 사냥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는 이 의문들을 따라가는 캐릭터를 곧장 투입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햇병아리 FBI 요원 ‘제인 배너(엘리자베스 올슨)’의 근무지는 라스베가스. 더구나 출신지는 플로리다. 즉, 그녀는 와이오밍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추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즉 우리 관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에 놓인 인물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투입’된 것이다.

배너 요원이 ‘윈드 리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얇은 FBI 점퍼를 벗고 스노우 수트를 빌려 갈아입는 일이다. 아마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그 스노우 수트가 주인공 코리의 딸이 입던 옷이라는 걸 슬쩍 보여주는 사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배너 요원을 바라보는 주인공 코리의 시선을. 비록 <시카리오>의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처럼 “당신은 내 죽은 딸을 생각나게 해요.”라는 대사를 던지지는 않지만, 그 시선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 순간 둘은 이미 팀이 된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영화는 영락없이 감독인 테일러 쉐리던의 말처럼 ‘CSI:와이오밍’의 형국을 취하는 듯하다. 또는 ‘와이오밍판 <양들의 침묵>’의 색채를 띠는 것 같기도 한다. (예컨대 동네 ‘약쟁이’ 청년들의 아지트에 진입해 수색하는 장면에서의 제인의 모습은 다분히 ‘버펄로 빌’의 집에 혈혈단신으로 진입한 ‘스털링(조디 포스터)’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다른 점은 <윈드 리버>가 FBI 요원이 아니라 철저히 토박이 사냥꾼 코리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배너 요원의 시점을 따를 때마저도, 상황은 언제나 화면 밖에 있는 코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가 이 사건에 깊숙이 발을 담그는 이유, 즉 ②번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영화가 한 시간 쯤 경과된 시점에 배너 요원에게 코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낱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해답에서 놀랍다든지 의외라든지 하는 구석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까지 영화가 잽처럼 던지던 힌트들에 의해 대략 짐작되던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화는 소용돌이의 중심부인 ①번 의문으로 지체 없이 진입한다. 그런데 그 방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결정적인 실마리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져지고 있다. 서스펜스 압출용 음악이나 효과음도, 긴박한 클로우즈업이나 슬로우모션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일상적인 상황, 그저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튀어나온 한두 개의 실마리가 어느 새 영화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놓고 있다.

다른 여러 대목들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대목이 테일러 쉐리던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감독 데뷔’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뭔가를 보여주자’ 강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절제는, 그의 두 편의 전작들이 다른 감독들의 연출에 의해 그야말로 ‘헐리우드 전설’이 될 정도의 격렬한 관심과 찬사를 얻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쉽지 않아 보인다. 하긴, 그가 20년 간 영화판에 몸담아 온 베테랑 배우이기도 한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긴 한다만, 그럼에도.

아무튼 그 장력 드높은 긴장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영화는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의문, 즉 ①번 의문의 실체로 진입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통해서다. 그것이 등장하는 타이밍은 상당히 적절하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는 짐승’에 대한 냉정한 묘사는 역시나 힘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②번 의문과 마찬가지로 크게 놀랍지는 않다. 적어도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던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반전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영화는 자신이 던진 의문들에 대한 단서들을 굳이 감추지 않아왔다. 의문들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견인로프일 뿐 목적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

 

 

이 영화의 결말? 아니나 다를까 코리의 손에 의해 실현되는 이 영화의 탈리오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상당히 영리하게 계산되고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끝도 없이 드리운 비탄과 절망의 회색 구름에 비쳐드는 한 줄기 햇빛처럼 관객들에게 쾌감을 안길만하다. 하지만 그 탈리오 복수극에는 이미 비슷한 지점을 수도 없이 많이 거쳐 간 다른 영화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다.

물론 따뜻한 아버지와 냉정한 사냥꾼의 모습을 아무 모순 없이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제레미 레너의 연기, 그리고 비탄에 빠진 ‘인디언’ 아버지 길 버밍엄, 그리고 그래엄 그린의 존재감과 연기도 이 여정에서 만나는 큰 즐거움이다.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해지는 대사들은 간결하고 담담하며 아름답다. 죽은 소녀 뿐 아니라 죽어버린 땅(‘윈드리버 인디언 보호구역’)과 죽어버린 종족(북미대륙 원주민)에 대한 진혼인 듯 울리는 닉 케이브/워렌 엘리스의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들은 테일러 쉐리던이 말하는 “다른 사람에게 연출을 맡겨서는 절대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이 영화의 목적지인가? 아니. 이 영화의 목적지는 다름 아니라 ‘윈드 리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의 끝 그 자체다.

 

 

흔히 ‘변경(frontier) 3부작’ 또는 ‘국경 3부작’이라 불리는 테일러 쉐리던의 세 영화(각본작인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 그리고 이 영화)는 사실 ‘무법 3부작’이라고 부르는 편이 그 실체에 더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 작품은 일관되게 ‘중심’의 법이 ‘변경’에서 무력화되는 조건과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리오>에서 법은 중심의 필요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 법은 변경의 분노와 절망에 의해 개인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윈드 리버>에서 법은 ‘변경’이라는 조건 자체가 일으킨 자연발화로 인해, 정지되고 무장해제 되고 소각된다.

그렇게 세 영화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으며 몸을 기대고 있는 문명세계의 게임의 룰의 위태로움을 새삼 일깨움과 동시에, 우리가 막연한 낭만을 품은 채 동경하는 야생의 날카로운 발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그 발톱은 우리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의 몽글몽글한 솜털 속에 깊이 묻어두고 있는 그 발톱과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윈드 리버>가 ‘CSI:와이오밍’ 이상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2017년 9월 16일자 한겨레 토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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